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침공 3년째에 접어든 상황에서 국방장관을 군 경험이 없는 경제 관료로 교체해 이목이 쏠린다.
12일(이하 현지시간) 러 국영 <타스> 통신과 미국 CNN 방송 등을 보면 집권 5기를 맞아 내각 개편에 나선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새 국방장관에 제1 부총리를 지낸 안드레이 벨로우소프 임명을 제안했다. 세르게이 쇼이구 현 국방장관은 국가안보회의 서기로 자리를 옮긴다.
드미트리 페스코프 러 대통령궁(크렘린) 대변인은 경제 전문가인 벨로우소프 전 부총리를 국방장관으로 임명하기로 한 까닭으로 우크라이나 전쟁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이는 “잘 알려진 지정학적 상황”으로 인해 “경제에서 안보 블록 비용이 차지하는 비중이 7.4%에 이르렀던 1980년대 중반 상황에 점차 접근 중”이어서 “안보 경제를 국가 경제와 긴밀히 연결되도록 해 현재의 역동성에 부응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것을 들었다.
그는 “전장에선 혁신에 열린 사람이 승리한다”며 이러한 배경에서 “푸틴 대통령은 민간인이 국방부를 운영해야 한다고 결정했다”고 설명했다. 페스코프 대변인은 발레리 게라시모프 러시아군 참모총장은 자리를 지켜 “군사적 구성” 측면에선 “변화가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벨로우소프는 군 경력이 전무한 경제학자 출신의 경제 관료다. 러 <스푸트니크> 통신과 <로이터> 통신 등을 보면 1959년 러 모스크바에서 태어난 벨로우소프는 모스크바대에서 경제학을 전공해 1981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이후 2006년까지 소련 경제아카데미 중앙수학연구소,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경제예측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일했다. 2000년 무렵 러 총리 비상근 고문으로 정부 경력을 시작했고 2006년에 경제부 차관으로 임명되면서 본격적으로 관료의 길을 걸었다. 2012년엔 경제부 장관이 됐고 2013~2020년까진 대통령 경제 고문을 맡았다. 2020년엔 제1 부총리로 임명됐다.
벨로우소프 임명 배경은 현재 러 경제가 군수 산업을 동력으로 성장하고 있는 것과 관련이 깊다. 러시아는 2022년 우크라이나 침공 뒤 서방의 제재를 받으며 2022년 국내총생산(GDP) 성장률 -1.2%를 기록했지만 2023년 3.6%로 반등에 성공했다. 전문가들은 국방 지출을 늘리는 전시 경제로의 전환이 이 같은 성장을 이끌어냈다고 보고 있다. <뉴욕타임스>(NYT)는 국방장관에 경제학자를 임명한 것을 두고 푸틴 대통령이 “군사적 승리에 있어 산업력의 중요성을 암묵적으로 인정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는 러시아가 전쟁을 장기전으로 보고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기도 하다. <뉴욕타임스>는 “푸틴 대통령이 변화를 만들고 러시아가 장기전을 치를 수 있는 경제 역량과 규율을 갖추고 있음을 보이려” 한다며 이번 내각 개편이 전쟁의 “전환점”이 될 수 있다고 내다봤다.
<워싱턴포스트>(WP)도 푸틴 대통령의 연설 비서관을 지낸 압바스 갈리아모프가 소셜미디어(SNS)를 통해 벨로우소프의 역할을 “장기전을 치르는 데 필요한 자원을 찾는 것”으로 봤다고 전했다. 갈리아모프는 “벨로우소프는 ‘모든 것은 전선과 승리를 위해’ 정신으로 경제를 동원하는 것을 지지하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경제 상황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의 민간 동료들이 그에게 무언가를 숨기기는 힘들 것”이라고 전망했다.
<로이터> 통신에 따르면 러시아 외교관을 지낸 카네기 러시아 유라시아센터 선임 연구원 알렉산더 바우노프도 이번 임명에 “러시아 군산복합체와 경제 전체의 우월한 힘으로 우크라이나에 서서히 압력”을 가하려는 푸틴 대통령의 “승리 전략”이 반영돼 있다고 봤다.
올해 러시아 예산의 거의 3분의 1 이 국방 예산으로 배정되면서 규모가 급증한 관련 예산을 더 효율적으로 집행하고 부패 방지 필요성이 커진 것도 벨로우소프 임명의 배경으로 보인다. 지난달 쇼이구 장관의 측근인 티무르 이바노프 국방부 차관이 대규모 뇌물 수수 혐의로 구금되기도 했다.
<파이낸셜타임스>는 푸틴 대통령과 벨로우소프를 수십 년간 알고 지낸 한 인물이 “그(벨로우소프)는 기술관료(technocrat)이며 매우 정직하다. 푸틴 대통령은 그를 아주 잘 안다”며 현재 국방부와는 달리 “벨로우소프는 전혀 부패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고 전했다.
그러나 예산 지출의 효율화가 반드시 지출 축소를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전문가는 짚었다. <파이낸셜타임스>는 러 중앙은행에서 일했던 알렉산드라 프로코펜코가 “벨로우소프는 경제에서 산업의 역할을 적극 지지하며 국방 부문을 통해 경제에 현금을 공급하는 것에 찬성한다”며 “국방 지출은 줄어드는 게 아니라 늘 수도 있다”고 내다봤다고 전했다.
2022년 우크라이나의 반격을 허용하면서 비판의 대상이 된 쇼이구 장관은 지난해 그를 비난하며 일어난 용병 집단 바그너 그룹 수장 예브게니 프리고진의 반란이 빠르게 마무리된 뒤에도 자리를 지켰지만 지난달 측근의 부패 혐의가 불거지며 해임이 초읽기에 들어갔다는 관측이 나왔다.
쇼이구 장관이 새로 맡게 된 국가안보회의 서기는 명목상으론 국방장관보다 높은 자리지만 실질 권한은 적다는 평가다. <워싱턴포스트>에 따르면 프랑스에 기반을 둔 러시아 정치 분석 회사 알폴리틱(R. Politik) 설립자 타티아나 스타노바야는 “국가안보회의가 푸틴 정권의 ‘전’ 핵심 인사들을 위한 저장고가 되고 있다. 이들을 놓아줄 순 없지만 이들을 위한 자리는 더이상 없다”고 지적했다.
한편 <타스>를 보면 지난 10일 우크라이나 제2의 도시 하르키우가 있는 북동부 지역에서 지상전을 시작한 러시아는 전날 하르키우주 5개 마을을 점령한 데 이어 12일 4개 마을을 추가로 점령했다고 주장했다. 다만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올렉산드르 시르스키 우크라이나군 총사령관은 상황이 “상당히 악화”했지만 우크라이나의 방어선을 돌파하려는 러시아의 시도는 지금까지 성공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우크라이나 내부에선 러시아군이 “그냥 걸어 들어왔다”며 국경에 방어선이 제대로 구축되지 않았다는 비판이 나왔다. 영국 BBC 방송은 2022년 하르키우 탈환을 위한 공세에 참여했던 우크라이나 특수 정찰 부대 사령관 데니스 야로슬라우스키가 “1차 방어선이 없었다. 러시아인들은 그냥 걸어 들어왔다”고 주장했다고 전했다.
그는 지뢰밭 등 방어 시설이 아예 존재하지 않았고 당국자들이 비용 핑계로 이를 설치하지 않은 것은 “태만 혹은 부패”이며 “실패가 아닌 배신”이라고 규탄했다. 방송은 데니스가 “화가 난다”며 “우리가 2022년 이 영토를 탈환하기 위해 싸웠을 때 수천 명을 잃었고 우린 목숨을 걸었다. 이제 누군가가 요새를 건설하지 않아 우린 또 다시 사람들을 잃고 있다”고 비판했다고 전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북동부에서 새 전선을 연 목적은 아직 불확실하다. 지연됐던 미군 무기가 우크라이나로 대거 반입되기 전 대공세를 시작했다는 분석, 러시아 영토 내 국경 지대에 우크라이나의 공격이 지속되며 푸틴 대통령이 언급한 일방적 ‘완충 지대’ 설정 시도라는 분석, 러시아가 전쟁 목표로 제시했던 최전선인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 지방에서 우크라이나 병력을 북동부로 이동시키고자 하는 시도라는 분석 등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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