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기니 비악섬의 해변 옹벽. 섬 사람들은 밀려드는 해수로부터 부모님 묘소를 지켜내기 위해 시멘트 옹벽을 쌓았다. 사진=전경수 교수 |
서로 머리를 다듬어 주는 비악섬 여자들. 이곳 사람들은 자연에 해를 끼치면서 살아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사진=전경수 교수 |
모란흠향(牡丹歆饗). 방금 열린 모란꽃 봉오리 속으로 들어간 벌 한 마리가 나오지 않는다. 가까이 코를 대고 들여다보니 꽃술들 가운데 나둥그러진 벌 한 마리. 모란 향에 기절했다. 마당에 핀 모란이 재건축 과정에서 용케 살아남아서 스무 송이나 꽃봉오리를 맺었다. 개나리가 옆에서 노랑 꽃잎을 아직도 달고 있는데. 자연의 혼돈이 목전에서 진행되고 있음을 본다. 모란의 시계가 자연을 제대로 진단하고 있다. 선거판의 혼돈은 시간이 지나면 제자리를 잡을 것이지만, 자연의 혼돈은 어느 방향으로 어떤 속도로 진행되는 것인가?
아무도 가늠하지 못하는 것이 혼돈의 정도를 말해주는 지표다. 40년 전부터 나는 이러한 문제를 강연과 논문으로 소리 높여 거론했다. 자연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삶을 모델로 살아보자는 일종의 생태환경운동이었다. 30년 전에는 ‘똥이 자원이다’라는 책을 발간했다. “원시시대로 돌아가자는 얘기냐”는 항의도 끊임없었고, ‘똥’을 입에 담는다는 조롱도 어지간히 뒤따랐다. 그래서 20년 전에는 다시 ‘똥도 자원이라니까’라는 제목의 책을 발행했다. 전자는 출판사 사장이 쌍수를 들고 환영했지만, 후자의 출판사 대표는 난색을 표시한 적도 있었다.
자연질서를 거스르는 삶이 가져올 파탄이 우리 집 마당에서만이 아니라 이제는 전 지구적으로 총체적인 자연에서 드러나 있다. 일부에서는 ‘지구탈출’ 시험들을 하고 있지만, 그것도 모두 돈방석에 앉은 자들의 돈놀음일 뿐. 인류에게 적용되는 것은 무상(無常)과 필멸의 질서다. 군비경쟁과 인공위성 제작 과정에서 생산되는 엔트로피는 생각도 않는 것이 세계 과학계의 현실이 아닌가. 그 돈이면, 살림살이의 터전이 눈앞에서 수몰로 진행되고 있는 태평양 섬 사람들의 걱정을 덜어줄 수 있을 텐데.
학생들과 함께 뉴기니 섬을 찾은 적이 있다. 한반도의 3.5배나 되는 거대한 섬은 유럽이 식민지를 확장하던 시기 책상 위에서 삼등분으로 나뉘었고, 네덜란드와 독일 그리고 영국 차지가 되면서 외부지배의 가시밭길 역사가 시작됐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부분적으로 점령했던 일본은 이 섬을 신야마토(新大和)라고 작명하는 포부도 보였다. 태평양을 ‘대동아해’라고 개명한 것과 동일한 맥락이었다.
이 섬은 토러스해협을 격하여 호주 대륙과 마주 보고 있다. 그 토러스해협의 가운데 위치한 트로브리안드 섬에서 제1차 세계대전 동안에 인류학자 말리노프스키의 명작이 탄생했다. 내가 간 곳은 그 반대편 동북쪽의 비악섬이었다. 파푸아로 불리는 이 지역은 무장독립단체(OPM)의 활동을 탄압하는 인도네시아 군대가 주둔하는 곳이었다. 해변을 끼고 있는 마을의 풍광은 야자수 그늘이 울창하고, 물장구를 치는 아이들의 모습은 한없이 평화스럽게 보였다. 그곳 마을에서 여아가 탄생하면서, 아내의 이름을 여아의 이름으로 승계받아도 좋겠는가 하는 요청이 있었다. 학교 선생님인 움베르또의 딸 이름이 ‘누미’다. 이제 14세가 되었을 것이다.
해변가의 도로변으로 돌 무더기들이 쌓여 있었고, 한쪽에서는 긴 모래사장에 돌담 쌓는 공사를 하고 있었다. 정부가 시멘트를 보조해주고, 주민들이 동원돼 산으로부터 돌을 운반하고 인부들이 해안벽을 치고 있었다. 파도가 센 날은 바닷물이 마을 안으로 들어온다고 했다. 파푸아 사람들의 묘지는 집 주변의 마당이다. 오래전 작고한 조부모의 묘소와 최근 사망한 부모님 묘소들이 마당에 즐비하다. 밤에는 묘소마다 등불을 밝힌다. 그것이 악령 출현을 막기 위한 방법이란다. ‘까르와르’로 불리는 악령은 잘못된 조상신이라고. 사람들 눈에는 보이지 않는 ‘까르와르’는 개의 행동에 의해서 인지된다. 개는 ‘까르와르’를 볼 수 있다고. 그래서 개가 짖는 소리가 들리면, 사람들은 거의 자동적으로 “아, 까르와르!”라고 소곤대면서 몸을 움츠리는 시늉을 했다. 조상 묘소는 주민들의 일상생활 공간에 함께 있다. 묘소 주변은 시멘트로 되어 있고, 무덤과 무덤 사이에 밧줄을 걸어서 빨래를 널기도 하고, 아이들은 묘소 주변을 뛰어다니면서 숨바꼭질도 한다. 일상생활의 공간에서 함께 살고 있는 ‘죽은 자’의 집인 묘소가 바닷물에 잠기기 시작했다. 해수면 상승이 원인이고, 그렇게 해서 올라오는 바닷물을 막기 위해서 길고 긴 해안가에 돌담 시멘트를 구축하고 있었다.
태평양에 산재한 섬들 중에서도 바누아투 쪽이 해수면 상승의 피해가 가장 심각하다. 섬의 3분의 1이 잠기기 시작했다고 바누아투 총리가 유엔에 호소한 지가 오래되었다. 비악 사람들은 “산 사람은 산으로라도 도망을 가면 되지만, 조상들은 그대로 수장될 운명”이라고 한탄한다. 수장된 조상의 까르와르들은 악령으로 돌변할 것이고, 악령에 시달려야 할 사람들의 살림살이가 암담한 미래다.
파푸아 사람들은 그야말로 자연에 해를 끼치면서 살아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그들의 살림살이는 탄소의 ‘탄’자도 모르는 방식이다. 기름때가 바닷가의 돌바위에 여기저기 시커멓게 달라붙었다. 태평양을 지나는 선박들과 해상사고로부터 방출된 기름들이 파푸아 사람들의 살림살이를 위협한다. 잘 먹고 잘 사는 사람들의 살림살이 방식이 저지른 죄과를 엉뚱한 파푸아 사람들이 받고 있다. 알래스카의 이누이트도, 히말라야의 네팔과 랩랜드의 사미 사람들도, 아마존의 인디오들도 모두 기름 한 방울 안 만져보고 기후변화의 일차 피해자가 되어 버렸다.
서울의 누미가 비악의 누미를 생각한다. 모란흠향이 한 달이나 빨라진 서울 살림을 걱정하는 것이나, 비악 마을의 무덤들이 수장되는 것을 걱정하는 것이나 다 부자들의 탄소배출 때문에 일어난 결과인데. 이렇게 잘못 돌아가는 문제는 누구에게 손해배상 청구를 해야 하나. 기후변화로 인한 피해가 기하급수적으로 누적되어 가고 있는 현상은 이미 과학적으로 증명됐고, 피해자도 속속 확인됐다. 피해보상을 위한 입법체계 앞에서 꿀 먹은 벙어리가 된 ‘가진 자’들의 행패를 바라보면서 속수무책인 나를 한탄한들 무슨 소용일까. 그래, 우리는 ‘법대로’ 해야 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입증책임을 물어야 할 대상도 분명하게 확정된 상태이거늘, 입법체계의 한계를 저주만 하고 있을쏘냐. 국제법이라는 법체계가 적용될 수 없는 대상이라면 우주법이나 세계법이라도 만들어야 할 것 아닌가. 인류일원론과 공생론에 대한 철학 빈곤의 비극이다.
전경수 서울대 인류학과 명예교수
jsm64@fnnews.com 정순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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